본문 바로가기
성경 이야기

🏺 언약궤 시리즈 3편 : 블레셋은 왜 언약궤를 돌려보냈는가 — 쥐와 종기의 재앙, 그리고 두려움이 만든 선택

by think12161 2026. 4. 30.
반응형

블레셋은 언약궤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7개월 뒤—
그들은 그것을 돌려보냅니다.

황금까지 얹어서.

 

========



블레셋은 이겼다.

기원전 11세기, 에벤에셀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무참히 패했다. 이스라엘은 3만 명의 보병을 잃었고,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다. 그리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전장으로 가져온 가장 귀중한 것을 빼앗았다.

언약궤.

블레셋의 기쁨은 짧지 않았을 것이다. 적국의 최고 신성한 물건을 탈취한다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 신들 사이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선언이었다. 블레셋은 언약궤를 자신들의 최고 신 다곤(Dagon)의 신전에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7개월 후, 블레셋은 언약궤를 이스라엘에게 돌려보냈다.

자발적으로.

황금 선물까지 얹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1. 사건의 전체 흐름 — 사무엘상 5-6장 정밀 독해



사건은 세 단계로 진행된다.

1단계 — 아스돗의 다곤 신전 (사무엘상 5:1-5)

블레셋 방백들이 언약궤를 아스돗으로 가져와 다곤의 신전 안에 두었다. 다음날 아침,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있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곤을 일으켜 세웠다. 그 다음날 아침, 다곤이 다시 엎드러져 있었는데 이번에는 더 심각했다. 머리와 두 손목이 문지방에서 끊어지고 몸통만 남아있었다. (사무엘상 5:4)

2단계 — 도시를 돌아다니는 재앙 (사무엘상 5:6-12)

언약궤가 아스돗에 있는 동안,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들을 심히 쳤다. "독한 종기" 재앙이었다. 아스돗 방백들이 언약궤를 가드로 옮겼다. 가드에도 같은 재앙이 왔다.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옮겼다. 에그론에서도 재앙이 왔다. 블레셋 다섯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히브리어 원문과 칠십인역(LXX)에는 쥐(아크바림, עַכְבָּרִים) 떼가 땅을 뒤덮었다는 언급도 있다.

3단계 — 돌려보내기로 결정 (사무엘상 6:1-18)

7개월 후, 블레셋 방백들이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을 불러 물었다: "이스라엘의 신의 궤를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전문가들의 답은 명확했다: 돌려보내라. 그것도 속건제 예물을 함께 보내라. 예물은 구체적이었다: 금 종기 다섯 개와 금 쥐 다섯 개 — 블레셋의 다섯 방백 수에 맞춰.

운반 방법도 특별했다.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메어본 적 없는 젖 나는 암소 두 마리에 언약궤를 싣되, 그 어미 소들의 송아지는 집에 가두라. 소들이 스스로 벳세메스 길로 간다면 이 재앙이 여호와에게서 온 것이고, 돌아온다면 우연이었다는 것이다.

소들은 스스로 벳세메스로 향했다. 길을 벗어나지 않고, 울면서도 직진했다.


2. 첫 번째 논쟁: 다곤 신상의 붕괴 — 기적인가, 자연 현상인가



📌 논쟁 포인트 ①: 다곤 신상은 실제로 쓰러졌는가, 신학적 서술인가

🔵 전통적 견해: 이것은 신들의 전쟁에서 여호와의 승리다

전통 신학은 다곤 신상의 붕괴를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로 읽는다. 고대 세계에서 정복당한 민족의 신상을 승리한 민족의 신전에 두는 것은 표준적인 관행이었다. 이것은 "우리 신이 너희 신보다 강하다"는 정치적, 종교적 선언이었다.

블레셋이 언약궤를 다곤 옆에 둔 것은 바로 이 선언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역학을 완전히 뒤집으셨다. 다곤이 여호와 앞에 엎드렸다 —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두 번째에는 머리와 손목까지 끊어졌다.

머리와 손은 권위와 능력의 상징이다. 다곤의 머리와 손이 잘렸다는 것은 다곤의 신성과 능력이 완전히 무력화되었다는 신학적 선언이다.

신학자 **로버트 폴진(Robert Polzin)**은 이렇게 쓴다: "다곤 에피소드는 하나님이 인간의 패배와 무관하게 승리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졌어도, 하나님은 지지 않으셨다."


🔴 비판적 시각: 이것은 문학적 풍자이지 역사적 기록이 아니다

비판학자들은 이 이야기 전체를 신학적 풍자(theological satire) 장르로 읽는다. 다곤이 넘어지는 장면, 그것도 두 번이나, 두 번째에는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희극적 과장 — 이것은 역사적 사실의 서술이 아니라, 이방 신의 무력함을 조롱하는 문학적 기법이라는 것이다.

이사야 44장도 유사한 풍자를 사용한다. 나무를 잘라 반은 불에 태우고 반으로는 신상을 만드는 것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 지혜 전통에는 이방 우상을 조롱하는 풍부한 문학 장르가 있었다.

또한 고고학적으로, 다곤은 블레셋의 신인 동시에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숭배된 곡물신이었다. 이 신에 대한 풍자는 이스라엘 주변 세계의 종교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 균형 있는 시각: 풍자와 역사는 배타적이지 않다

문학적 풍자 기법이 사용되었다는 것과,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성경 저자들은 실제 사건을 신학적으로 해석된 언어로 기록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무엇을 주장하는가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서 패배하신 것처럼 보일 때에도 패배하지 않으신다. 언약궤가 빼앗겼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패배하신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블레셋의 심장부에서 스스로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셨다.

이 신학은 후대 이스라엘 역사 — 바벨론 포로기, 페르시아 지배, 헬레니즘 압박 — 에서 반복적으로 위로와 저항의 근거가 된다.

 

=====

그렇다면 질문이 남습니다.

언약궤는
정복된 물건이었을까요,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을까요?


3. 두 번째 논쟁: "독한 종기" 재앙의 정체



📌 논쟁 포인트 ②: 재앙의 의학적 정체 — 흑사병이었는가

사무엘상 5장의 "독한 종기(עֹפָלִים, 아팔림)" 재앙과 함께 등장하는 쥐 떼의 조합은 현대 학자들에게 즉각적인 연상을 일으킨다.

흑사병(Bubonic Plague).

흑사병은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 박테리아가 쥐 벼룩을 매개로 인간에게 전염되는 질병이다. 가장 특징적인 증상은 **림프절에 생기는 거대한 종기(bubo)**다. 쥐 개체수 증가와 함께 확산되며, 치사율이 극히 높다.


🔵 전통적 견해: 재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심판이다

보수 신학은 재앙의 의학적 메커니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의 도구였다고 본다. 하나님이 초자연적 개입을 위해 자연적 과정을 사용하시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는 패턴이다. 출애굽의 열 재앙도 마찬가지다.

재앙이 언약궤가 옮겨지는 도시마다 따라갔다는 것은, 단순한 자연적 역병이 아니라 의도적 심판이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비판적 시각: 이것은 역병의 신화화다

비판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민간 병인론(folk etiology) — 이해할 수 없는 역병의 원인을 신화적으로 설명하는 전통 — 의 산물일 수 있다고 본다. 고대 사회에서 갑작스러운 역병의 발생은 항상 신의 분노로 해석되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하고 약탈한 직후에 역병이 왔다면, 그 원인을 약탈한 신성한 물건에 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고대인의 해석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의 기록인지, 아니면 후대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 이야기 재구성인지는 역사비평학의 중요한 질문이다.


🟢 균형 있는 시각: 의학적 사실성과 신학적 의미는 함께 성립한다

사무엘상 6장에 등장하는 금 쥐와 금 종기는 의학적으로 의미심장하다. 고대 세계의 동종요법(Homeopathic Magic) 전통에서, 질병을 일으킨다고 생각되는 것과 같은 형상을 만들어 속건제로 드리는 것은 재앙을 돌려보내는 의식이었다.

블레셋 제사장들이 금 쥐와 금 종기를 함께 만든 것은, 그들 스스로 이 재앙이 쥐와 연관된 종기임을 인식했다는 증거다. 이것은 흑사병의 전형적인 증상 조합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수전 스콧(Susan Scott)**과 **크리스토퍼 던컨(Christopher Duncan)**은 이 기록을 고대 세계에서 흑사병 발생의 초기 문헌 증거 중 하나로 제시한다.

쥐 → 벼룩 → 종기 → 급격한 사망. 이 사슬이 블레셋 도시들을 휩쓴 것이다. 하나님이 그 자연적 과정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신학과, 실제 역병이 발생했다는 역사가 배타적이지 않다.


4. 세 번째 논쟁: 금 쥐 다섯과 금 종기 다섯 — 속건제의 신학



📌 논쟁 포인트 ③: 블레셋의 제의는 진정한 회개인가, 주술적 거래인가

사무엘상 6:4-5에서 블레셋 제사장들의 지시는 구체적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드릴 속건제 예물은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그들이 이르되 다섯 방백의 수효를 따라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이라 너희와 너희 방백들에게 내린 재앙이 같으니."

그리고 흥미로운 말이 이어진다:

"너희의 땅을 망하게 하는 쥐의 형상이라 이스라엘 신에게 영광을 돌리라 그러면 그의 손이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을 가볍게 여기지 아니하리라." (6:5)


🔵 전통적 견해: 블레셋은 여호와의 실재를 인정했다

전통 신학은 이 장면을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장면으로 읽는다. "이스라엘 신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블레셋 제사장의 말은 공식적인 신학적 항복 선언이다.

또한 블레셋 제사장들이 이집트의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6:6: "바로와 이집트 사람들이 완악하게 굴다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았느냐"). 이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고 있었고, 그 역사에서 여호와의 능력을 두려워했다.


🔴 비판적 시각: 이것은 신학적 귀의가 아니라 주술적 거래다

비판적 시각에서 보면, 블레셋의 행동은 여호와 신앙으로의 회심이 전혀 아니었다.

금 쥐와 금 종기를 만드는 것은 **동종 주술(Sympathetic Magic)**의 전형이다. 재앙을 일으킨 것과 같은 형상을 만들어 보냄으로써 재앙을 돌려보내는 것 — 이것은 이스라엘의 속죄 신학이 아니라 블레셋의 주술적 세계관이다.

블레셋은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신으로 인정했을 뿐, 자신들의 신앙을 바꾼 것이 아니었다. 고대 다신론 세계에서 이것은 일반적인 태도였다 — 각 지역과 민족에는 그 영역을 관장하는 신이 있고, 그 신의 영역에서는 그 신을 달래야 한다.


🟢 균형 있는 시각: 블레셋의 행동은 주술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셨다

블레셋이 여호와를 진정으로 예배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블레셋의 불완전하고 혼합된 신앙적 반응마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셨다.

속건제라는 개념 자체가 흥미롭다. 블레셋 제사장들이 이 상황에 적용한 것은 이스라엘의 아샴(אָשָׁם, 속건제) 개념이다. 어떻게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속건제 개념을 알았는가? 두 민족이 오랫동안 인접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종교적 개념은 국경을 넘어 이동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언약궤는 돌아왔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루어졌다. 도구가 완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의도는 성취된다.


5. 네 번째 논쟁: 젖 나는 암소의 기적 — 소들은 왜 벳세메스로 향했는가



📌 논쟁 포인트 ④: 암소들의 행동은 기적인가, 자연적 설명이 가능한가

블레셋 제사장들이 설계한 테스트는 영리했다. 멍에를 메어본 적 없는 젖 나는 암소 두 마리. 이 소들은 훈련되지 않아서 길을 따라 걷는 것 자체가 어렵다. 게다가 갓 낳은 송아지들이 집에 갇혀 있다 — 젖 나는 암소의 모성 본능은 강력하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소들은 뒤를 돌아서 송아지들에게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소들은 직진했다. 울면서도, 벳세메스 길을 따라.


🔵 전통적 견해: 이것은 명백한 기적이다

훈련받지 않은 젖 나는 암소 두 마리가, 송아지를 두고, 낯선 길을 따라 이스라엘 국경까지 직진했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통적 해석이다.

이 기적의 신학적 의미도 중요하다. 블레셋의 테스트 자체가 "만약 소들이 간다면 우연이 아니라 여호와의 뜻"이라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소들이 갔다. 하나님 스스로 블레셋이 설정한 테스트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셨다.


🔴 비판적 시각: 이야기의 구조가 기적 서술의 신학적 장치다

비판학자들은 이 장면의 세부 사항들이 모두 기적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과장된 설정이라고 본다. 멍에를 메어본 적 없는 소, 젖 나는 암소, 갇힌 송아지 — 이 모든 요소는 기적이 얼마나 불가능한 조건에서 일어났는가를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다.

또한 소들이 벳세메스로 간 것이 신의 인도 때문인지, 단순히 그 방향에 먹이나 물이 있어서인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 균형 있는 시각: 블레셋의 신학적 태도가 더 중요하다

소들의 행동의 자연적 설명 가능성 여부와 무관하게, 이 장면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블레셋 방백들의 반응이다:

"블레셋 다섯 방백이 벳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가서." (사무엘상 6:16)

그들은 따라갔다. 두려워하면서, 혹은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소들이 벳세메스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 이후 블레셋은 언약궤를 다시 빼앗으러 오지 않았다. 이 사건이 블레셋에게 심리적, 신학적으로 얼마나 강력한 충격이었는가를 보여준다.


6. 다섯 번째 논쟁: 벳세메스 사람들의 죽음 — 왜 이스라엘 사람도 죽었는가



📌 논쟁 포인트 ⑤: 언약궤를 들여다본 죄 — 호기심이 죽음을 불렀는가

사건은 벳세메스에서 또 다른 반전을 맞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궤를 보고 기뻐했다 — 여기까지는 이해된다. 그런데 그다음:

"벳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보았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인을 죽이셨으니." (사무엘상 6:19)

숫자 문제부터 논쟁이 시작된다.

숫자의 논쟁: 히브리어 원문은 **"50,070명"**이다. 그런데 이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벳세메스는 소규모 레위인 성읍이었다. 도시 전체 인구가 5만 명이 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칠십인역(LXX)은 이 숫자를 **"70명"**으로만 기록한다. 많은 현대 학자들은 **"70명"**이 원래 숫자이고, **"50,000"**은 필사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 전통적 견해: 언약궤의 거룩함에 대한 경외심 부재가 문제였다

출애굽기의 율법에서 언약궤는 보지 말아야 하는 물건이었다. 민수기 4:20은 고핫 자손에게 명시적으로 경고한다: "그들이 성소에 들어오지 말라 그들이 죽을까 하노라."

언약궤를 들여다보는 것 — 즉 뚜껑을 열거나 내부를 엿보는 행위 — 은 율법의 명백한 위반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과 달리 이 규정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죄는 무지가 아니라 경솔함이었다.


🔴 비판적 시각: 언약궤 이야기 전체가 일관성 없는 폭력적 신 개념을 드러낸다

비판학자들은 이 장면을 웃사 사건과 함께 묶어 제시한다: 언약궤를 잘못 만진 사람도 죽고, 들여다본 사람도 죽는다. 이 패턴은 고대의 마나(mana) 개념 — 신성한 물건에는 접촉하는 자를 죽이는 위험한 에너지가 있다는 원시 종교 개념 — 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언약궤 이야기를 이스라엘 종교의 원시적 단계를 반영하는 자료로 보며, 후대의 윤리적 유일신론으로 발전하기 이전의 원시 신앙 형태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 균형 있는 시각: 거룩함의 물리성은 신학적 의미를 담는다

성경 신학에서 언약궤의 위험성은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의 물리적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는 죄인에게 근본적으로 위험하다.

이것은 원시적 마나 개념과 표면적으로 유사하지만, 내용이 다르다. 마나는 맹목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이다. 언약궤의 위험성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거룩함이 죄와 경솔함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 직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언약궤를 가져가 달라고 요청한다. 그것은 언약궤가 파괴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누가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능히 서리요" (6:20)라고 고백하는 신학적 순간이다. 웃사 사건과 마찬가지로, 죽음이 경외심을 가르쳤다.


7. 여섯 번째 논쟁: 이 이야기 전체의 신학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 논쟁 포인트 ⑥: 언약궤 내러티브의 신학적 통일성

사무엘상 4-6장은 **"언약궤 내러티브"**라는 독립적 문학 단위로 학자들에게 인식된다. 이 단위는 언약궤가 빼앗기고 → 블레셋을 재앙으로 치고 → 스스로 돌아오는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갖는다.


🔵 전통적 견해: 하나님의 자기 변호(Self-Vindication)

전통 신학은 이 내러티브 전체를 하나님의 자기 변호로 읽는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전쟁의 부적으로 사용한 것은 이미 잘못이었다 (4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분을 이용하려 했을 때 그들을 패배하게 하셨다. 그러나 블레셋에게 그분의 거룩함을 직접 드러내시고, 결국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에도 불구하고, 또한 블레셋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이야기다.


🔴 비판적 시각: 이 내러티브는 패배를 신학적으로 합리화하는 사후 서술이다

비판학자들은 이 내러티브가 에벤에셀 전투의 역사적 패배를 신학적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 하나님이 패배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것이다 — 라는 신학으로 소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 재앙을 신학적 의미로 전환하는 이스라엘 지혜 전통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 균형 있는 시각: 패배의 신학화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역사의식이다

비판학자들의 관찰 자체는 옳다. 이스라엘은 패배와 고통을 단순히 불운이나 신의 부재로 읽지 않고, 신학적으로 해석했다. 이것은 고대 세계에서 매우 독특한 역사의식이다.

대부분의 고대 민족은 패배를 기록할 때 그것을 숨기거나, 이유를 외부에서 찾거나, 또는 역사를 조작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패배를 솔직하게 기록하고, 그 원인을 자신들의 죄에서 찾았다. 이것은 **내향적 책임(inward accountability)**의 역사 서술이다.

이 방식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가, 아니면 사실을 더 깊은 의미 층위에서 해석하는가 — 이것이 성경 역사 서술에 대한 핵심 신학적 질문이다.


8. 블레셋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



블레셋은 언약궤를 7개월 동안 가지고 있었다.

그 7개월 동안 이스라엘은 어땠을까. 지도자들은 죽었고, 수만 명의 군사가 전사했고, 성소의 가장 거룩한 물건을 적에게 빼앗겼다. 제사장 엘리는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죽었다 (사무엘상 4:18).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 고 하며 죽었다 (4:21-22).

이것이 이스라엘이 경험한 7개월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7개월 동안 블레셋에게 직접 일하셨다. 이스라엘의 도움 없이. 이스라엘의 기도 없이.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리고 언약궤는 돌아왔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가장 깊은 신학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의 실패에 의해 최종적으로 좌절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부적처럼 사용한 죄, 그 죄의 대가로 빼앗긴 수치, 7개월의 침묵 — 이 모든 것을 관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블레셋의 심장부에서 증명하시고,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돌려보내셨다.

은혜는 자격이 있는 자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편에서는 솔로몬 성전 이후 언약궤가 어떻게 역사에서 사라졌는가를 다룬다.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때, 언약궤는 어디로 갔는가 — 파괴되었는가, 숨겨졌는가, 아니면 하늘로 올라갔는가.


=====

그렇다면 더 큰 질문이 남습니다.

솔로몬 성전 이후,
언약궤는 왜 역사에서 사라졌을까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때—
언약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파괴되었을까요,
누군가에 의해 숨겨졌을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라진 것일까요.

👉 다음 편에서는
“언약궤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 성경 기록과 역사적 전승, 그리고 주요 가설들을 함께 다룹니다.

 

참고 자료: 사무엘상 4-7장 | Robert Polzin (Samuel and the Deuteronomist), Susan Scott & Christopher Duncan (Return of the Black Death), Rudolf Otto (The Idea of the Holy), Walter Brueggemann (First and Second Samuel: Interpretation Commentary), John Goldingay (Old Testament Theology Vol. 1)

반응형